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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 서론

by csk 2019. 1. 1.

아는 분들과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기로 했다. 한 번 읽었는데, 아무것도 모를때라 다시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서 사람을 모아봤다. '제대로'를 위한 추가 장치로 챕터별 정리를 해보려 한다. 새해 첫날 첫 결심인데, 얼마나 잘 진행될지 지켜봐주시길...


서론 이전에 한국어판 서문과 일반 서문에서 그의 매력에 퐁당... :-)

인간적인 매력을 많이 느꼈다. 한국어판에 붙인 서문에 한국미술에 대해 경험한 바가 없어 넣지 못했으나, 멀리 유럽 작가(=곰브리치)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자국의 미술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있지않냐며 걱정하는 모습이 따스하더라. 사실 난 서양 미술만 줄기차게 파고있어 찔리기도 하고...
미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일반인을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쉽게 다가가게 할까 고민한 흔적이 많다. 쉽게 설명하려 애쓰는 진정한 전문가의 면모가 존경스럽다.   

미술의 역사를 평범한 말로 다시 한번 설명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미술사의 전후 이야기가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이해시켜주고, 장황한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에 관해 몇 마디 암시를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의 미술감상을 돕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집필의도를 명확하고도 겸손하게 정리한다. 


미술가들의 새로운 시도를 높이 사면서도 그것이 차곡차곡 쌓이는 발전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 예를들면 오래 전 미술이 현대 미술 보다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그의 시각도 드러난다.

예술가들은 각각 자신이 그 전세대를 능가했다고 생각하고 또 그의 견지에서 보면 이전에 알려졌던 어떤 것을 능가하는 진보를 이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술가들이 자신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보고 느끼는 그러한 해방감과 승리감을 우리가 같이 느낄 수 없다면 그 작품을 이해하기를 바랄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방향에서의 득이나 진보가 다른 방향에서는 손실을 수반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 주관적인 진보가 그 자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예술적 가치의 증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훌륭하지만 이 책에서는 빠질 수 밖에 없었던 화가들 이름을 나열하길래 아는 사람이 몇 명인가 세어본다. 세 명. 아직 많이 부족하니 열심히 공부해야지. 코로는 16판에서 추가되었다고 한다. 

  1. 카르파초 : 르네상스 이후인 1400년대 이탈리아 베네치아 화가로 벨리니의 제자인데 고전적 느낌의 정적인 그림이 많다. 
  2. 카날레토 : 역시 이탈리아 베네치아 화가인데 1700년대에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오늘날의 대학생 배낭여행 격인 당시 유럽 귀족 자제들의 그랑 투어에서 기념품으로 많이 사가는 풍경화였다고 한다.  
  3. 코로 : 1800년대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로 조용한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얼마전 일본 오사카에 가서 직접 봤는데, 아름다운 색감과 그림속의 고요에 부드럽게 동화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직접보면 아무 감흥이 없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코로는 직접관람이 훨씬 더 좋더라.  


짧게 적으려고 했는데, 이제야 서론이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정말 유명한 문구다. 처음 읽었을때 솔직히 심쿵했다. 깊이 공감한다. 모든 것은 개인이 존재하고 행위하는 것의 결과이고 차차 의미가 입혀지고 이름 붙여지고 분류된다. 이 책은 마지막까지 미술 사조의 흐름을 우선하지 않고, 미술가 개인이 처한 역사안에서 어떻게 고민하고 행동했는지, 그 결과로써 작품을 풀어내준다.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래서 정말 잘 이해된다. 내가 싫어했거나 내가 이해하지 못해던 작품들도, 그래서 그렇겠구나 하는 수용의 범위에 들어오게 된다. 그게 이 책을 읽는 제일 큰 수확이라고 감히 주장해본다. 

미술에서의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운 소재를 그려서 얻는것이 아니고, 개인의 호불호에 따른 취향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실제와 똑같이 그렸느냐와 같은 표현방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화가가 표현하고자 한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개인적 습관과 편견을 버리고 그들의 '창'을 통해 작품을 보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실제와 같게 그리는 것이 훌륭하다는 생각은 오래된 것이지만 많은 함정을 가지고 있다. 예를들어 17세기까지만 해도 말이 앞뒤로 네 발을 쭉 뻗고 달리는 모습이 종종 그려졌지만 사진 기술의 발달로 실제로는 그런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깜짝 놀랄만큼 정확하게 그려진 세밀화 들은 14세기 플랑드르파에 의해 그려졌지만, 매우 다른 화풍을 가진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목표 또한 실외에서 빛에 의해 눈에 보이는 순간을 정확히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었다. 

화가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면을 추구하기도 한다. 카라바조는 로마 식민지의 세리였던 마태를 가난한 노동자의 모습으로 표현해 거절당하고 다시 그렸는데, 사실 그 당시 세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세무 공무원이 아닌 집정관과 세금 징수 계약을 맺은 지역 불량배 무리에 가까웠다고 하니 사실성을 추구하던 카라바조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라파엘로의 초원의 성모는 아름다운 색채로 우리 눈을 사로잡지만 정작 그는 수많은 스케치를 하며 안정된 구도를 얻기 위해 고심했다.  


다시 읽어보니 모든 문장이 나에게 말을 거는것 같다. 그 사이에 알게된 지식들이 연결점을 만들어 나가고 감동을 더 크게 일으킨다. 1장부터의 내용이 더욱 기대된다. :-)

오늘 서론 정리는 여기까지로 마무리. 할 말은 많은데, 어떤식으로 풀어야 할지 모르겠고 그림도 넣을까 싶은데, 저작권 고민되고 사실은 귀찮다. ㅎㅎ... 일단 글이라도 끝까지 정리 해보기로! 


그래도 아쉬워서 넣어본 그림 하나는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 

성당에서 거부된 작품으로 전쟁에 소실돼 현재는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