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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 8~11장

by csk 2019. 1. 20.

혼돈기의 서양 미술 (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 유럽 )

500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분명하고 통일적인 양식이 생겨나지 않은 이유는 여러 민족과 계급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뒤죽박죽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수도원과 수녀원에 보존돼 있던 고대 미술을 부활시키려 시도가 여러차례 있었지만 야만인으로 간주되는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미술과도 흡사한 켈트족, 색슨족의 예술은 서유럽에 영향을 주었고, 동유럽의 비잔틴 미술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했다.  
이집트 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 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이와같이 서유럽에서는 정확하게 보이는대로 표현하는 것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이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성화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 역사를 자세한 그림으로 표현한 무려 1080년 작품인 바이외 태피스트리도 이야기의 전달 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에는 특히 필사본의 그림이 발달했는데, 관심이 있다면 필사에 대한 역사를 풍부한 그림과 함께 다루고 있는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를 추천한다.  

전투적인 교회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은 육중한 기둥이 받쳐주는 아치가 특징이다. 불에 잘 타는 목조 지붕 대신 석재 지붕을 올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엄청난 양의 석재로 튼튼한 기둥을 만들고 엇길리게 늑재를 겹친뒤 사이사이 세모난 구역을 가벼운 재료로 메우는 방법을 사용했다. 교회의 입구에는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조각을 하고 촛대와 세례반에도 마찬가지로 장식을 했다. 

12세기는 십자군의 시대로 비잔틴 미술과의 왕래가 많아 서유럽은 동방교회의 장엄하고 성스러운 성상을 모방하면서 동서가 서로 경쟁했다. 

그림에 언급된 우르술라라는 성인는 잉글랜드의 공주로 천여명의 처녀와 함께 성지 순례차 로마에 다녀오는 길에 훈족에게 순교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공주 복장에 종려나무와 화살, 하얀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교회의 승리 (13세기)

서유럽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고딕이라는 양식이 시작되었다. 기둥만으로 늑재를 받치고 나머지 부분은 창을 크게 만들어 벽을 가볍게 한다. 지지력을 높이기 위해 부벽을, 특별히 신랑(nave)의 상층부 지지를 위해 공중부벽을 설치하고 아치 대신 첨형아치를 사용해 높이를 높였다. 이전보다 더욱 화려해진 교회는 신도들에게 천국을 눈앞에 보여주는 효과를 주었다. 
조각에 있어서도 자연스럽고 개인적인 표현이 나타나서 그리스 로마 고전 예술을 다시 찾은 듯 보인다. 조각 발달의 영향으로 회화도 발전했으며, 자연스런 표현의 지오토로 이어진다. 그의 그림은 매우 사실적이며 감정 표현 또한 개인적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하는데 예술가가 개인으로써 인식되는 것도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귀족과 시민 (14세기)

그림과 관계는 없지만 초서(Chaucer)라는 작가가 설명이나 수식어 조차 없이 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계속 언급된다. 잉글랜드 작가인데 처음으로 라틴어나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 무렵 단테도 같은 이유로 이탈리아에서 유명하고 인기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모국어로 작품을 쓴 첫 작가라는 타이틀은 중요한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고닥은 더욱 화려한 스타일로 진화했고, 도시의 발달로 교회 뿐만이 아니라 궁 또는 관공서도 규모있게 건축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베네치아의 도제궁인데, 그러고보니 도제궁의 장식이 '베네시안 고딕'이니까 고딕의 일종 이었어! 

교회에서 쓰는 것 뿐아니라 개인 소유용 조각 작품이 등장하게 됨에따라 조금씩 규칙에서 자유로워지면서 한층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 출현하게 된다. 

책에서 말하는 국제적 고딕 양식이 무얼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 위키검색을 해본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영향을 주고받고 여러 나라고 퍼져나가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이 양식은 14세기 전반 아비뇽 법황청(法皇廳)에 시모네 마르티니가 초빙되어 전파케 된 시에나파(派)와 북방의 고딕 기법이 교류하여, 후기 고딕의 정교한 화려성이나 사실성과 시에나파의 정서 표현이나 설화성(說話性)이 혼합되었다. 아비뇽에 관계한 각지의 성직자에 의해 이 양식은 전유럽에 보급되어, 14세기로부터 15세기에 걸쳐 유행하였다. 랭브르 형제, 케른파의 로호나, 체코파의 화가들, 이탈리아의 우첼로, 안젤리코 등은 이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다. 이 경향은 조각에도 파급되었다.

이런 변화가 더 가속되면서 드디어 르네상스가 도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