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기의 서양 미술 (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 유럽 )
이집트 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 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이와같이 서유럽에서는 정확하게 보이는대로 표현하는 것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이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성화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 역사를 자세한 그림으로 표현한 무려 1080년 작품인 바이외 태피스트리도 이야기의 전달 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에는 특히 필사본의 그림이 발달했는데, 관심이 있다면 필사에 대한 역사를 풍부한 그림과 함께 다루고 있는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를 추천한다.
전투적인 교회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은 육중한 기둥이 받쳐주는 아치가 특징이다. 불에 잘 타는 목조 지붕 대신 석재 지붕을 올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엄청난 양의 석재로 튼튼한 기둥을 만들고 엇길리게 늑재를 겹친뒤 사이사이 세모난 구역을 가벼운 재료로 메우는 방법을 사용했다. 교회의 입구에는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조각을 하고 촛대와 세례반에도 마찬가지로 장식을 했다.
12세기는 십자군의 시대로 비잔틴 미술과의 왕래가 많아 서유럽은 동방교회의 장엄하고 성스러운 성상을 모방하면서 동서가 서로 경쟁했다.
그림에 언급된 우르술라라는 성인는 잉글랜드의 공주로 천여명의 처녀와 함께 성지 순례차 로마에 다녀오는 길에 훈족에게 순교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공주 복장에 종려나무와 화살, 하얀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교회의 승리 (13세기)
귀족과 시민 (14세기)
교회에서 쓰는 것 뿐아니라 개인 소유용 조각 작품이 등장하게 됨에따라 조금씩 규칙에서 자유로워지면서 한층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 출현하게 된다.
책에서 말하는 국제적 고딕 양식이 무얼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 위키검색을 해본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영향을 주고받고 여러 나라고 퍼져나가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이 양식은 14세기 전반 아비뇽 법황청(法皇廳)에 시모네 마르티니가 초빙되어 전파케 된 시에나파(派)와 북방의 고딕 기법이 교류하여, 후기 고딕의 정교한 화려성이나 사실성과 시에나파의 정서 표현이나 설화성(說話性)이 혼합되었다. 아비뇽에 관계한 각지의 성직자에 의해 이 양식은 전유럽에 보급되어, 14세기로부터 15세기에 걸쳐 유행하였다. 랭브르 형제, 케른파의 로호나, 체코파의 화가들, 이탈리아의 우첼로, 안젤리코 등은 이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다. 이 경향은 조각에도 파급되었다.
이런 변화가 더 가속되면서 드디어 르네상스가 도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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